명비와 조형물 답사기행🧭

Exploring sculptures and monuments

조형물, 탑, 명비/동상,흉상

안중근 의사 동상 (경기도 부천시 안중근공원)

김놉새 2022. 10. 27. 16:59

안중근 의사는 조선침략의 핵심인물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입니다. 1879년 9월 2일에 태어났으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0년 3월 26일 32살 중국 뤼순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경기도 부천시에는 안중근 공원이 있는데요,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상과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다룬 스토리월이 있습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안중근 의사 동상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면


안중근 의사는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육을 통한 실력 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귀국하였습니다. 학교를 설립하고 경영하며 교육에 힘썼으며 연해주 의병운동을 일으켰으며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등을 도맡아 했습니다.
1909년 3월에 12명이 모여 동의 단지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습니다. 여기서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제거에대한 맹세를 합니다.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자 왼손 넷째 손가락(무명지)을 잘라나온 피로 대한독립이라 새겨 넣었은 뒤 대한국 만세!라고 만세삼창을 외쳤습니다. 또한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단지(斷指) (출처=국가보훈처)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문기사를 통해 이토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코코프체프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온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습니다. 코코프체프와 열차 회담을 마치고 이토가 차에서 내렸습니다. 그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을 쐈습니다. 혹시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다시 쐈습니다. 처음 쏜 4발 가운데 3발은 이토 히로부미가, 1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의 오른팔에 맞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쏜 3발은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세이타로가 맞았습니다. 1발은 플랫폼에 박힌 채로 발견되습니다. 그렇게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고, 러시아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
안중근 의사가 체포되면서 외쳤습니다.

순국 직전 안중근의 모습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안중근(安重根)]

재판이 시작됐습니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은 안중근은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 사령의 자격 즉 의병의 신분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습니다.
이는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기 때문에 형사범이 아닌 전쟁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당당히 말한 것입니다. 국내외에서 안중근 의사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뤼순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형식적인 절차로 일본인 관선 변호사가 안중근 의사의 변호를 맡게 되었습니다.

재판과정에서 그의 당당하고 정연한태도와 말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은 감탄했습니다. 이때 안중근의 변호를 맡았던 관선 변호인 미즈노는 그의 태도에 감복해 “그 범죄의 동기는 오해에서 나왔다고 할지라도 이토히로부미를 죽이지 않으면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는 조국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변론해주었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안중근의사는 사형을 선고받게됩니다.
죽음을 앞둔 며칠 전 안정근과 안공근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그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지냄) 하지 말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앞면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 안중근 공원 출구 쪽에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결연한 표정과 독립을 위한 굳은 의지가 동세와 옷의 결에서 나타납니다.

안중근 의사의 혈서로 쓴 글씨가 있는 태극기 엽서 / 출처 : 안중근 의사 기념관

동상 밑 좌대에는 안중근 의사 (安重根義士)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는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 도장(장인)과 대한독립이라 쓴 안중근 의사의 혈서 태극기가 보입니다.

옆면

장인이 동그랗게 좌대를 두르고 있습니다.

뒷면

덤덤히 독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듯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입니다.

 

 

명판

하얼빈 안중근 의사 동상을 부천에 세우기까지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의사 동상은 역사적 의거 현장인 중국 하얼빈시 중앙대가에 2006.1.16일 세웠다가 11일 만에 실내로 이전 보존했다. 우국충정으로 동상을 제작했던 안중근의사 동상건립위원회 ''이진학''회장이, 2009.10.12일''안중근 평화재단 청년아카데미''를 통해 부천시에 기증했다. 부천시는 중동공원을 ''안중근 공원''으로 그 명칭을 변경하고 안중근 의거 100주년 기념으로 안중근 의사의 민족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이 자리에 동상을 세우다.
2009. 10. 26
부천시장 홍건표

동상과 스토리월


안중근 의사의 일생은 나라 독립에 대한 의지로 움직였습니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순국 직전 유서중-

다음 글에서는 안중근 공원의 스토리월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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