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는 조선침략의 핵심인물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입니다. 이전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알아봤습니다. 이어서 그 옆으로 있는 기념 조형물 부조벽화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 조형물 부조벽화

부조벽화는 동상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업기간이 2011년 10월 25일까지였습니다. 벌써 11년이 넘은 작품입니다. 작품명은 대한국인 안중근 불꽃같은 삶입니다. 장성재 작가님과 권치규 작가님이 작업하셨습니다.

독특한 구조의 작품입니다. 램프가 설치되어있어 누구나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가 보이는 바닥입니다.

밤에는 조명이 들어오는 듯합니다. ㄱ자모양의 지붕이 인상적입니다. 벽화는 총 3개의 석재벽으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중간 안중근의사의 장인모양의 통로가 있습니다.
긴 벽이라서 자칫하면 답답해 보일 수 있는 벽에 개방감있고, 조형미를 더해주었습니다.

앞면에는 안중근 의사의 활동 모습을 표현해 냈습니다.
저 멀리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안중근의사의 모습이 돌출되어있어 눈에 띕니다.

大韓國人 安重根 (대한국인 안중근)
국채보상운동
1907년 대구에서 일어난 국채보상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자 안중근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 국채 보상회 관서지부를 설치하고 1천여명의 선비들이 모인 평양 명륜당에서 의연 금을 내도록 권유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아내와 제수들에게도 권고하여 반지 패물까지 헌납하도록 하는 등 열성적으로 구국을 위한 활동을 펼 친다.
교육운동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는 등 조국과 민족을 되살리기 위해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친다.
북간도와 연해주의 독립운동
의병으로 구국을 도모하고자 했던 안의사는 1908년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한다. 이때 생포한 포로를 만국공법에 의해 석방하는 등 안의사의 평화사상이 보여진다. 안중근의사는 북간도를 거쳐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러시아령 연해주에 도착, 한인 의병대열에 참여하여 이범윤, 김두성 등과 의병을 양성하고, 다음해 30세 되던 1908년 봄 김두성을 총독, 이범윤을 대장으로 한 대한국 의군창설에 성공한 안의사는 참모 중장으로 선임되어 독립특파애장의 이름을 띠고 치열한 항일 투쟁을 결행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7월에는 의병 300여명을 사살하고 그대로 일군의 주요기지인 해령으로 진격하여 5,000여명의 일본수비군들을 격퇴하는 등 13일 동안 30여 차례 교전을 했다.

굳건한 신념 - 동의단지회
1909년 초 11명의 동지들과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일심단결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단지동맹을 맺는다.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하여 1909년 2월 노령카리에서 동지 11명과 한자리에 모여 왼손 무명지를 짤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쓰고 하늘과 땅에 맹세하였다.
단지혈맹동지 12인
안중근, 김기룡, 강순기, 정원주, 박봉석, 류치홍, 조순응, 황병길, 백규삼, 김백춘, 김천화, 강창두

하얼빈 역에서 기차에서 내린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모습이 표현되어있습니다. 굳게 쥔 주먹이 그의 독립에대한 굳은 의지를 반영해 놓은 것 같습니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태극기가 뒤로 펄럭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평화와 정의의 현장 하얼빈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이토의 하얼빈 방문 소식에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의거를 계획하고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다.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악
1. 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을사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독립을 요구하는 죄없는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 정치 체제로 바꾼 죄
6. 철도, 광산, 산림, 농지 등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군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한국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죄
8.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9.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죄
11. 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조리 빼앗아 불 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14. 대륙을 침략하여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그리고 안중근의사의 자작시인 장부가의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장부가는 안의사가 의거 전 지은 시로 대한독립의 포부가 나타난 시 입니다.

펄럭이는 듯한 태극기가 의거모습 뒷편으로 펼쳐져있습니다.

두번째 벽에는 독립(獨立)이라는 안중근의사의 유묵 그리고 기도하는 안중근의사의 모습과 연보가 담겨져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연보
1879년 9월 2일 : 순흥 안씨 안태훈공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탄생하다.
1884년 6세 : 조부와 부친을 따라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다.
1894년 16세 : 동학을 빙자하여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 폭도들을 진압하다. 김아령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다.
1895년 17세 : 천주교에 입교하여 홍석구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도마>라는 믿음의 이름을 받고 홍신부와 함께 황해도 지방을 순회 전도하다.
1905년 12월 27세 : 일본의 불법 침략을 세계 각국에 호소,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청국 상하이로 여행하다. 귀국, 부친 별세, 청계동에서 장례식 엄수.
1906년 3월 28세 :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한 후 가산을 기우려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여 구국영재를 양성하다.
1909년 2월 31세 : 노령 <카리>에서 12동지와 단지혈맹, 이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쓰고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로 하늘과 땅에 맹세하다.
1909년 10월 26일 : 하얼빈 역두에서 동양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의 원흉 일본의 이등박문을 사살함.
1910년 3월 9일 : 홍신부로부터 안의사의 영생영락을 위하여 고해성사와 미찰성제대례, 예수님의 성체성혈 받아보시는 대례식에 감옥소의 일반관리들이 모두 와서 참례했다. 여순감옥에서 검찰관, 전옥, 통역, 간수정과 두 변호사의 입회하에 정근, 공근 두 아우와 홍신부를 면회하고 동포에게 고하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다. 옥중자서전, 유묵, 동양평화론 등을 쓰다.
1910년 3월 26일 : 안 의사 의거후 152일이 되는 3월26일 상오10시에 집행되다. 어머님께로 부터 보내온 한복을 갈아입고 여순감옥 형장에 임하여 「나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 일이니 한 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부탁을 남기고 순국하시다.
의사의 유해는 보통 사형수와 달리 새 송판으로 침대관을 지어 입관 하고 의사께서 몸에 품었던 예수님의 성화를 덮어 여순감옥 수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안중근의사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더불어 동양의 평화를 염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중근의사 의거의 역사적 의의
안중근 의사는 조선왕조 말엽에 태어나 일제 침략이 나날이 심해지던 대한 제국 시대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지사이다. 안중근 의사의 짧은 생애는 동양 평화를 위한 항일 독립 운동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안중근 의사의 의병 활동과 하얼빈 의거 그리고 사형을 당하기 전까지 보여준 그의 사상과 행동에도 잘 나타나있다. 안중근 의사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선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직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애국지사다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이러한 모습은 다음세상의 사람들에게도 나라를 사랑하고 겨례의 발전을 위해 저마다 제 구실을 다 하게끔 용기를 심어 주었다. 안중근 의사는 민족 정기를 지닌 동시에 동양 평화를 지키려 했던 사람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에서 쓴 '동양평화론'에서 항상 이해관계가 서로 엇갈리기 쉬운 한국,일본,중국 등 동양의 세 나라가 중심이 되어. 여순과 같은 분쟁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에 유럽 공동체와 같은 기구를 만들어 서로 협력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발전은 물론 세계 평화에도 이바지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일본의 대륙 침략을 나무라고 이러한 침략전쟁은 결국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안중근 의사의 이러한 예언은 그대로 들어 맞았다. 일본은 그 뒤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하고 한국은 독립을 이룩했으니, 안중근 의사가 앞날을 내다보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진정한 동양 평화의 수호자 임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날이 갈수록 빛을 발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중국, 미국 등지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사상을 연구하고 추모하는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존경할 만한 애국 지사요 사상가로 우리 역사의 길이 빛날 것이다.
인심결합론(人心結合論)
사람이 만물보다 귀 하다는 것은 다른것이 아니라 삼강오륜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첫째는 몸을 닦고 둘째는 집안을 바로 다스리고 셋째는 나라를 보호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은 몸과 마음을 서로 합하여 생명을 보호하고, 집은 부모와 아내와 자식에 의해서 유지되고, 나라는 모든 국민의 단결에 의해서 보존되는 것이어늘, 슬프다. 우리나라는 오늘날 이같이 비참한 지경에 빠졌으니 그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합하지 못 한 것이 제일 큰 원인인 것이다. 이 불화하는 병의 원인은 교만이다. 수많은 해독이 교만으로부터 생겨나니, 교만한 무리들은 저보다 나은 자를 시기하고 저보다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동등한 자는 서로 다투어 아랫사람이 안되려 하니, 아찌 서로 결합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교만을 바로 잡는것은 바로 겸손이다. 사람이 만일 저마다 겸손하기를 힘써 자기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여, 남이 자기를 꾸짖는 것을 너그러이 하고 자기 공을 남에게 양보한다면, 사람이 짐승이 아니어늘 어찌 서로 불화할리가 있겠는다. 옛날에 어느 나라 임금이 죽을 적에 자식들을 불러 말하되. 너희들이 만일 내가 죽은 뒤에 형제끼리 마음을 합하지 못하면 쉽게 남에게 꺾일 것이고, 마음을 합하기만 하면 어찌 남들이 꺾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이제 고국산천을 바라보니 동포들이 원통하게 죽고 죄없는 조상의 백골마저 깨지는 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겠다. 깨어라 연해주에 계신 동포들아! 분국의 이 소식을 듣지 못했는가. 당신들의 일가 친척은 모두 대한땅에 있고, 당신들의 조상의 무덤도 모국 땅에 있지 않단 말인가. 뿌리가 마르면 가지도 잎새도 마르는 것이니, 같은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동포들이 이미 굴욕을 당했으니 내 몸은 장차 어떻게 하리오. 우리 동포들아! 모두 '불화' 무지를 깨뜨리고'결합'두 자를 굳게 지켜 자녀들을 교육하며, 청년 자제들은 결심하고 속히 우리 국원을 회복한 뒤에 태극기를 높이들고, 가족과 함께 독립관에 서로 모여 한 마음 한뜻으로 전세계가 울리도록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를것을 약속하자.

3번째 석재벽에는 앞뒤로 안중근의사의 유묵이 있습니다.
안의사의 유묵은 대부분이 1910년(경술년) 2월부터 3월 26일 순국직전까지 썼으며 모두 200여점 일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배운 한학을 토대로 선현들로 부터 듣고 배운 문장들을 독창적으로 인용하여 촌철살인의 경구로 구성해낸 것으로 모두 낙관 대신 1909년 2월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혈맹으로 짜른 왼쪽 수인이 찍혀 있다.
國家安危勞心焦思
국가안위노심초사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黃金百萬而不如一敎子
황금백만이불여일교자
황금 백만냥도 자식하나 가르침만 못하다.
見利思義見危授命
견리사의견위수명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던져라.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
치악의악식자불족여의
궂은옷 궂은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
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
백일막허도청춘부재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마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석재벽 앞면에는 의병활동과 연보 그리고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기전의 그의 사상과 의지가 드러난 모습이 표현되어있습니다.

이제 뒷면을 살펴보겠습니다. 뒤에는 이토히로부미를 저격 후 체포된 뒤 재판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까지의 모습이 나타나있습니다.

각국의 반응
한국에 이어 만주를 삼키려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의 피살에 대한 일본영사관의 전보는 실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으며, 온 세계가 떠들썩 했다. 동경 일일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의 호외가 나왔고 해외에 망명 독립운동을 하던 우국 지사들은 환호의 찬사를 보냈으나 조정의 친일파들은 오히려 당황했다. 중국은 또한 자기들의 원수를 갚은 것처럼 생각하며 기뻐했다. 당시 중국의 국가 주석이었던 원세개도 안의사의 의거를 듣고 다음과 같은 글을 지어 찬양했다.
안중근 의사 만 (安重根義士輓)
平生營事只今畢 死地圓生非丈夫
평생영사지금필 사지원생비장부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
신재삼한명만국 생무백세사천추
평생을 벼르던 일 이제야 끝났구려
죽을 땅에서 살려는 것은 장부가 아니고 말고
몸은 한국에 있어도 세계에 이름 떨쳤소
살아선 백살이 없는데 죽어서 천년을 가오리다

옥중에 남긴 글
5개월 동안 뤼순감옥에서 자서전 <안응칠역사>와 한국독립을 위해 나아갈 길을 제시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한다.
위대한 평화주의자와 동양평화론
안중근 의사는 동양이 평화로울수 있는 방법을 담은 <동양평화론>이라는 글을 남겼다. 동양평화론은 전부 다섯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중 머리말과 제1장에 해당하는 전감의 일부분만을 썼을 뿐이고, 그 나머지는 완성하지 못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을 쓰기 시작한지 10여일 만에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글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쓰려했던 내용을 통역을 맡았던 일본인 소노키에게 알려주어 그 기록이 남아 있어서,(히라이시 청취서) 안중근 의사가 미처 쓰지못한 부분의 내용을 조금이라도 알수있게 되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안중근 의사가 소노키에게 밝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러시아가 동양의 중심지이며 항구도시인 여순을 중국에게서 빼앗고, 이것을 다시 일본이 빼앗고 또 언젠가는 중국이 도로 찾으려 할 것이니 여순은 동양 각국의 다툼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차라리 여순을 중립 지대로 만들고, 아시아 각국에서 정부 대표를 보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위원회를 만들어 다툼을 미리 막고자 아래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 그리고 여라나라가 돈을 내어 은행을 만들고 그 돈을 어려운 나를 돕기위한 공동개발 자금으로 써야한다. 또 이 위원회가 동쪽 끝에 있는 점을 생각해 로마 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보내야한다. 로마 교황청이 참가함으로써 유럽의 여러나라가 일일이 참가하지않아도 이 위원회가 국제적 승인을 받고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유럽 공동체,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 각료회의 등이 생겨 국제적인 협력을 꾀하고 있는데, 안중근 의사는 이미 100여년 전에 이런 앞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안중근의사의 동양 평화론을 통해 안중근 의사가 한낱 군인에 불과한 사람이 아니라, 대정치가요 사상가였음을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의 법정투쟁
안중근의사는 하얼빈 의거가 한국의 독립돠 동양평화를 위해 거행된 것임을 불명히 밝힌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1910년 2월 14일 사항을 연도한다.

의거이유
내가 이토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한국 의군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한 것이니 만국 공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라.
장부다운 기품, 의병다운 의병의 태도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의거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거행된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나 일본 법정은 1910년 2월 14일 마지막 공판에서 사형을 언도하였다. 안의사는 "사형"이라는 언도를 받자 일본에서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느냐고 이 판결에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안의사의 태도는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 일지도 모를 상고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2월19일 안의사가 공소권을 포기하자 일본정부는 크게 놀랐다. 이는 장부다운 기품이며 의병다운 태도였다. 안의사가 상고하지 않은 것은 그의 굳은 뜻이었다.

최후의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을 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 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반장 : 명사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그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지냄.

是母是子 (그어머니에 그아들)
안의사의 모친은 안의사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두 동생을 급히 여순으로 보내면서 어미의 뜻을 전하라고 했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라고 전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전해들은 한국에서는 대한 매일 신보에 일본에서는 아사히 신문에 (그어머니에 그아들)라는 글을 실었다.

마지막에는 어머님께로 부터 보내온 한복을 갈아입고 여순감옥 형장에 임했던 안의사의 모습이 표현되어있습니다.
안의사의 순국
1910년 3월 26일 순국한 안중근 의사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몸과 집안을 돌볼 겨를없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는 한국 독립운동의 방향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었다.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안중근 의사 순국 112년을 맞은 2022년 10월 26일, 안 의사 유해 발굴을 위한 자료를 찾아냈다는 국가보훈처 보도자료가 나왔습니다. 옛 만주지역 신문인 성경시보(盛京時報)의 1910년 3월 30일 자, 순국 나흘 뒤 발행 기사로 안의사의 무덤에 대한 단서가 나와있었던 것입니다. 이 단서를 통해 안의사의 유해를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국권이 회복된 지금 고국으로 돌아오길 염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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